10. 주거지 크기 차이와 계층 분화의 서막
서울 암사동 유적지의 거대한 구덩이들 앞에 서면, 저는 가끔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1년 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신석기 시대는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어 먹던 따뜻한 평등 사회라고만 굳게 믿었었습니다. 하지만 발굴된 집터의 크기가 제각각인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 '평등' 이라는 단어가 차가운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복잡해 졌었습니다. 고대 사회 구조를 공부하며 제가 가졌던 선입견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조상들이 겪었을 그 때의 그 삶을 다시 상상해 봅니다.
환국 시대의 시작 연도와 신석기 정착 생활의 역사를 뒤쫓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모여 살며 만들어낸 사회적 위계의 흔적과 마주하게 됩니다.
가. 암사동 40여 기의 움집이 들려주는 보이지 않는 계급
우리역사넷의 기록에 따르면, 암사동에서 확인된 신석기 시대 집자리는 약 40여 기에 달합니다. 사실 100여 개가 넘는 주거지가 출토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것은 단순한 마을을 넘어선 거대 규모의 취락지였다는 사실에 전율하게 됩니다. 암사동 움집의 과학적 설계와 반지하 구조 가 주는 안락함 뒤에는, 이 대규모 인원을 통제하고 자원을 배분하던 보이지 않는 질서가 숨어 있었습니다.
핵심 포인트
신석기 시대 주거지의 크기 차이는 단순히 가족 수의 차이를 넘어, 마을 내에서의 역할 분담 과 초기 계층 분화 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지표 입니다.
주거지 면적에 따른 사회적 지위 분석
- 소형 움집(15㎡): 약 4.5평 규모로 2~3명이 거주하던 일반적인 공간이었습니다.
- 대형 움집(50㎡): 약 15평 규모로 소형보다 3배 이상 크며, 지도자의 거처나 공동 시설로 추정됩니다.
- 계획된 배치: 집들이 2~3기씩 모여 있는 양상은 혈연 중심의 씨족 사회가 체계적으로 조직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나. 3배의 면적 차이, 그것은 권력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집자리의 면적은 15㎡에서 50㎡까지 최대 3배 이상의 격차를 보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대가족이 사는 집이라 생각했지만, 춘천 교동 에서 발견된 실제 사용이 어려운 대형 간돌도끼 와 같은 의례용 유물들 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니 이것은 명백한 권위의 상징 이었습니다. 특정인만이 가질 수 있었던 옥 귀걸이나 장신구들이 동삼동 패총 에서 출토된 사실은, 이미 누군가는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권력을 가졌음을 암시합니다.
[표 1: 주거지 규모와 사회적 특징 비교]
| 구분 | 소형 주거지 | 대형 주거지 |
|---|---|---|
| 면적 규모 | 15㎡ 내외 | 50㎡ 내외 |
| 예상 인원 | 2~3명 | 6명 이상 또는 공동체 |
| 주요 특징 | 일반 생활용품 위주 | 의례용 도구 및 장신구 발견 가능성 |
| 사회적 의미 | 일반 씨족 구성원 | 마을 지도자 또는 제사장 거처 |
감상 팁
유적지 현장에서 움집 터를 보실 때 바닥의 화덕 위치와 전체 면적을 비교해 보세요. 지도자의 집으로 추정되는 큰 집터는 대개 마을의 중심부나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어 당시의 권력 구조를 짐작하기 좋습니다.
다. 환인의 통치와 조직화된 사회의 접점
환단고기가 기록한 '7대 환인의 국가' 라는 서사는 이러한 고고학적 데이터와 만나며 비로소 실체를 얻습니다. 80명에서 240명에 이르는 대규모 마을 인구를 관리하려면 반드시 공동 작업을 조율할 마을 지도자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암사동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를 거꾸로 박아 놓은 특수 저장 시설 은 잉여 생산물 을 축적하고 재산의 개념 이 생겨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신석기 시대는 정말 평등하지 않았나요?
완전히 평등한 사회라기보다는 초기 형태의 계층화가 시작된 과도기적 단계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집터 크기의 확연한 차이와 특정인에게 집중된 부장품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Q2: 지도자의 거처가 따로 있었던 증거가 있나요?
대형 움집 내부에서 의례용 도끼나 옥 장신구 등 희귀 자원이 발견되거나,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중심부의 위치 선점 등이 그 증거가 됩니다.
Q3: 왜 계층이 나뉘기 시작했나요?
정착 생활과 초기 농경으로 인해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고, 이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과정에서 권력과 재산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암사동의 흙바닥에 새겨진 크고 작은 움집의 흔적은 7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이미 조직적이고 위계적인 사회를 일구었음을 묵묵히 증언합니다. 비록 지금은 형태만 남은 구덩이일 뿐이지만, 그 안에는 더 나은 질서를 만들고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환인 시대 지도자들의 고뇌가 담겨 있는 듯한 생각을 해 봅니다.
핵심 정리
- 주거지 격차: 15㎡에서 50㎡에 이르는 면적 차이는 초기 계층 분화의 증거입니다.
- 사회적 조직: 200명 규모의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 '환인'과 같은 강력한 조율자가 필요했습니다.
- 재산의 축적: 저장 구덩이와 의례용 유물은 평등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가는 변곡점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사회 조직의 원형이 이 작은 흙구덩이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7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서울 암사동 유적, 신석기시대
- 우리역사넷 - 신석기 시대의 주거와 사회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사적 서울 암사동 유적
- 환단고기 삼성기 및 태백일사
- 강동문화포털 - 신석기 최대 집단취락지 암사동

댓글